우리 제주대학교 교수 일동은 제주특별자치도의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허용’ 방침의 철회를 요구합니다.
제주특별자치도가 제주에 내국인이 영리법인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허용하겠다는 입장을 거듭 천명하고 있습니다. 김태환 지사는 ‘국내 영리의료기관 허용은 제주의 운명을 좌우할 분수령’이라는 발언까지 하면서 강한 추진 의지를 보였고, 현 정부도 총리가 주재한 한 회의에서 이를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체 병원의 10%만 공공병원이고, 나머지는 전부 민간병원입니다. 우리나라 의료법이 영리법인 병원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까지 우리나라에는 영리법인 병원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존의 민간병원이 공공병원에 비해서 수익성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여 일부 왜곡된 모습을 띠는 것은 사실이나, 영리법인 병원의 심각한 폐해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라 하겠습니다.
영리법인 병원은 자본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하여 의료시설·장비·인력에 투자하고 의료기관을 운영함으로써 투자자에게 수익금을 배당할 책무를 지니는 ‘주식회사 의료기관’이라는 점에서 기존 비영리 의료기관과 근본적인 차이점을 갖습니다.
한마디로, 영리법인 병원은 의료업을 수단으로 삼아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존재 이유인 의료기업인 셈입니다. 외국의 경험을 보면, 주로 부유층과 중상층을 대상으로 고가의 서비스를 제공하며, 이로 인해 높아진 의료비는 민간의료보험을 통해 조달하게 됩니다. 영리법인 병원은 반드시 민간의료보험과 짝을 짓게 된다는 세계사적 경험을 보게 되는 바, 우리는 이 부분을 심각하게 우려하고 있습니다.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의 발언에 의하면, 제주특별자치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경제특구에도 내국인이 영리법인 병원을 설립하도록 허용할 태세입니다. 제주특별자치도에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이 허용된다면 경제특구에도 허용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지극히 타당한 해석인데, 이는 제주특별자치도와 경제특구가 유사한 법률적 지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영립법인 병원의 전국화를 의미합니다. 민간의료보험은 당연히 이들 영리법인 병원들의 의료비 조달기전으로 짝을 이루게 되며, 이것의 비중이 커지는 만큼 국민건강보험은 위축되고, 급기야 우리나라 의료제도는 ‘영리법인 병원-민간의료보험-부유층과 중상층’의 상층의료제도와 ‘비영리병원-국민건강보험-서민과 중산층’의 하층의료제도로 이원화될 개연성이 큽니다. 미국식 ‘식코’의 비극이 우리나라에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내국인이 설립하는 영리법인 병원이 허용되어야 제주 의료산업 발전이 가능’하다는 제주도 당국의 주장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이미 제주도에는 외국인이 영리법인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므로, 굳이 영리법인 병원을 추진하려거든 이것을 활용하면 될 것입니다.
내국인이 제주도에 영리법인 병원을 설립하는 것은 돈벌이에 혈안이 된 일부 의료자본과 민영보험회사, 그리고 여기에 이해관계가 걸려 있는 일부 세력의 이익에는 부분적으로 보탬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그리고 현행 건강보험 의료수가체제에 불만이 많은 의료계의 일부에서 화풀이는 될 수 있겠으나, 제주도의 경제 발전과 도민의 이익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나라 의료제도를 미국식의 ‘식코’형 의료제도로 만드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될 것입니다.
사회제도는 한 번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변경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유럽 선진국들보다 거의 2배에 가까운 의료비를 지출하면서도 5천만 명이 의료보험에서 소외된, 국민건강 수준이 선진국 중 최하위인 ‘식코’의 나라 미국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미국인 60% 이상이 한국형 국민건강보험제도를 옹호하고, 미국식 민영의료제도를 명시적으로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의료민영화체제는 견고합니다. 이미 의료보험자본과 의료자본을 둘러싼 이익창출구조가 제도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의료민영화의 시초를 여는 ‘제주도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허용’을 반대하는 이유입니다.
국민건강보험제도는 국민건강을 보장하는 소중한 버팀목입니다. 의료서비스 산업을 통한 경제성장과 지역발전의 명분이 긴요하다고는 하나, 결코 국민건강보험이 갖는 사회적 가치보다 높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주특별자치도 당국이 강변하듯이 의료서비스 산업의 육성이 ‘영리법인 병원’의 설립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도 아닙니다. 미국을 포함한 선진국 어디에서도 영리법인 병원이 의료서비스 산업의 주력인 곳은 없습니다. 태국처럼 저임금 구조에 기반 하여 선진국 의료소외계층을 상대로 외화벌이에 몰두하는 개도국 의료영리모델을 핑계로 영리법인 병원 허용을 강변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발전 수준을 모독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리고 여론조사에서 75.4%의 도민이 영리의료기관 허용을 찬성하였다는 것을 정당성의 논거로 삼는 제주특별자치도 당국의 행태는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허용’의 의미와 영향, 그리고 찬반논리를 도민들에게 충분히 설명하고, 이에 따라 제주도민들이 관련 내용을 충분히 이해한 상태에서 자신의 의사를 표명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리에 부합하는 것이겠으나, 이런 충분한 절차 없이 진행된 졸속적 여론조사는 민주적 정당성을 상실한 일종의 여론조작일 뿐입니다.
이에, 내국인이 영리법인 병원을 제주도에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정부와 제주도의 방침에 반대하는 우리 제주대학교 교수 일동은 제주특별자치도 당국이 여론을 호도하면서까지 일방적으로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설립 허용’을 밀어붙이는 독선적 행태를 중단해 주실 것을 요청 드립니다. 더불어, 의료민영화를 우려하는 도민과 국민의 목소리에 충분히 귀를 기울여 주실 것을 정중히 요구합니다. 지금이야말로 민주주의가 더욱 긴요한 시기입니다.
우리는 정부 및 도 당국과 도민 및 국민 간에 진정한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이 과정에서 충분한 민주주의가 보장될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우리는 우리의 요구가 정당한 만큼, 정부와 도 당국 스스로가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허용’ 방침을 철회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2008. 07. 07
내국인 영리법인 병원 설립을 반대하는 제주대학교 교수 일동
성명 참여 제주대학교 교수 명단 (가나다 순)
강동일(산업응용경제), 강봉수(윤리교육), 강사윤(의학), 강영준(의학), 강희경(의학), 고경희(영어교육), 고대만(윤리교육), 고호성(법학), 권영근(영어영문), 김광식(의학), 김동윤(국어국문), 김동전(사학), 김민호(교육학), 김정섭(생명공학), 김정숙(가정관리), 김정희(간호), 김창군(법학), 김현돈(철학), 김희정(언론홍보), 류현종(사회과교육), 박주옥(의학), 박지강(의학), 박형근(의학), 송효정(간호), 염미경(사회교육), 오홍식(과학교육), 유은숙(의학), 유철인(철학), 윤용택(철학), 은수용(의학), 이근화(의학), 이상이(의학), 이은주(간호), 이준완(의학), 이창익(일어일문), 이창인(의학), 정영배(의학), 정종태(수의학), 정진현(사회교육), 조성식(중어중문), 조성윤(사회학), 최국명(의학), 최낙진(언론홍보), 최재철(의학), 최현(사회학), 하승수(법학), 허규희(의학), 허남춘(국어국문), 현미열(간호) (총 49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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