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약산업이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산업의 주축인 상위 제약사들의 수익성이 곤두박질한 1분기 실적은 한국제약산업이 분명 위기의 궤도에 있음을 방증한다.
국내 1위 제약사인 동아제약은 벌써 3번째 자체 신약을 개발하는 등 정부의 신약개발 기대에 성실히 부응하고 있지만, 실적은 영 신통치 않다. 동아제약의 1분기 매출액은 2102억원으로 작년 동기(2010억원) 대비 고작 4.6%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대로 가면 당초 지난해 목표였던 매출 1조 달성은 올해도 실현 가능성이 없다.
영업이익(303억원)도 겨우 작년 동기(288억원) 대비 5.5% 성장했을 뿐이다. 순이익(204억원)은 아예 작년 동기(201억원) 수준에 멈추어섰다. 1932년 창업한 동아제약의 79년 역사상 이런 치욕은 처음이다.
◆ 상위 토종제약사 실적 곤두박질
나머지 기업들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2위 대웅제약은 1분기 매출액(1729억원)만 전년 동기(1559억원) 대비 10.10% 증가했을 뿐,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각각 22.07%, 12.73% 줄었다. <대웅제약은 2010년 4월부터 12월 결산으로 전환, 2010년 1월~3월 실적을 전년 동기로 분류했다.>
3위 유한양행(1642억원)도 매출이 정체(0.3% ↑)된 가운데, 영업이익(-35.6%)과 순이익(-38.9%)이 뚝 떨어졌고, 4위 녹십자는 매출액(-45.5%)과 영업이익(-81.1%)이 형편없이 주저앉았다. 순이익은 공개조차 못했다.
국내 제약사 중 가장 많은 연구개발비(연간 1000억원 이상)를 투자하는 한미약품(5위, -11.6%)과 수액제 특화기업인 중외제약(7위, -4.0%)은 매출이 역성장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이밖에 9위 LG생명과학은 매출(882억원)만 8.1% 증가한 가운데, 영업이익(-57.9%)과 순이익(-85.6%)은 곤두박질했다. 8위 종근당 역시 영업이익(28.5%)과 순이익(43.1%)은 양호했으나, 매출 증가세(2.9%)는 크게 둔화됐다. 10위 일동제약은 영업이익(157.69%)을 제외한 매출(-6.05%)과 순이익(-3.96%)이 감소했다. <일동제약은 대웅제약과 마찬가지로 2010년 4월부터 12월 결산으로 전환, 2010년 1월~3월 실적을 전년 동기로 분류했다.>
상위 제약사들의 실적이 이처럼 동반추락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한국 제약산업을 받히고 있는 연구중심 기업들이 하나같이 나락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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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분기 유일하게 실적이 좋았던 기업은 6위 제일약품이다. 제일약품은 매출(9.80%), 영업이익(41.11%), 순이익(70.0%) 모두 고른 성장을 거둬 제약업계의 부러움을 샀다. 하지만 이 회사는 의약품 도매업에 주력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종제약사의 성장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자체 신약은 개발하지 않고 화이자 등 다국적 제약사의 수입의약품이 성장의 원동력이다. 이는 다국적 제약사들의 국내 시장 지배력이 그만큼 확대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 주요 다국적 제약사 두 자릿수 매출 성장
실제로 지난해 한국노바티스(20.20%), 한국화이자(26.90%), 한국GSK(7.10%), 한국MSD(16.30%), 한국아스트라제네카(13.10%) 등 주요 다국적 제약사들의 매출 성장률은 국내 상위기업들을 크게 압도했다.
그야말로 순수 토종 제약사들만 최악의 혹한기를 보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약업계는 114년이란 우리나라 제약산업 역사상 근래처럼 힘든 시기는 처음이라며 긴 한숨을 내쉰다. 정부가 전방위로 압박하고 있는 리베이트 척결 때문이 아니다. 기등재의약품 목록정비, 리베이트-약가인하연동제, 사용량-약가인하연동제, 리베이트-쌍벌제, 시장형실거래가제(저가구매인센티브제) 등 무차별적 약가인하 기전 때문이다.
요즘 제약업계 분위기는 그야말로 ‘노기충천’이다. 숨돌릴 틈 없이 몰아붙이는 정부 정책에 대한 원망이 하늘을 찌를 듯하지만, 시쳇말로 ‘찍소리’도 못하고 속앓이만 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빌자면, “찍히고 싶지 않아서”라고 한다.
최근에는 복지부가 특허만료 의약품과 퍼스트 제네릭(복제약)의 보험약값을 추가 인하하겠다는 뜻을 공식화하면서 생존에 대한 업계의 위기감은 한층 고조되고 있는 터이다.
◆ 명분은 제약산업 선진화 → 결과는 토종제약업계 정조준한 꼴
정부의 약가인하정책이나 리베이트 척결은 건보재정 안정과 함께 제약산업 선진화라는 명분을 깔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외국계 제약사를 피해 국내 제약사를 정조준하는 꼴이 되고 있다. 최근 리베이트-약가인하 연동제 그물에 걸려든 기업도 모두 국내 제약사였다.
업계 관계자들은 “제약시장 역시 풍선효과를 비켜갈 수는 없다”고 말한다. 토종 제약사들이 빼앗긴 시장은 그대로 다국적 제약사들이 흡수하기 마련이라는 것. 정부는 약값 인하를 통해 건보재정을 절감한다고 하지만, 값싼 복제약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를 외국계 제약사의 고가 오리지널 약이 대체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국제약협회 이경호 회장(전 복지부 차관)은 최근 "리베이트는 제약업계가 반드시 정리해야 할 과제지만, 그렇다고 더 이상 약값을 인하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정책"이라며 답답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는 "현재 시행하고 있는 약가인하 기전에 대한 평가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약가인하가 이뤄질 경우 제약산업은 존립기반을 잃어버릴 수 있다"며 정부가 나무만 보지 말고 숲을 보아줄 것을 호소하기도 했다.
업계 역시 정부가 토종 제약산업을 뿌리채 흔들고 있다고 불만을 토한다. 지난달 3일 제약협회에서 열린 협회 이사장단, 약가제도위원회 통합워크숍은 정부에 대한 성토의 장 자체였다.
◆ “획일적 약가인하 건보재정 도움 안돼” … “제약업계 공멸”
참석자들은 "약제비 증가의 주요 원인은 약물 사용량임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약가인하 조치만 취하고 있다"며 "획일적인 약가인하는 보험재정에 도움이 되지 않고 제약산업 발전에 부작용만 양산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제약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부터 시행중인 시장형실거래가제로 올해 제약업계가 떠안아야 할 손실규모만 570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또 2013년까지 47개 약효군의 약가인하를 감안하면 기등재의약품 목록정비로 인해 총 8900억원의 매출 손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했다.
현재 진행중인 약가인하정책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압박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제약협회는 "정부의 납득하기 어려운 재산권 침해로 심각한 경영타격을 입고 있다"며 "더 이상 추가 고통분담을 감내할 여력이 없는 상태다. 값싼 제네릭 출시로 보험재정 절감에 기여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네릭 가격이 더 낮아지면 제약사들은 신약개발이나 마케팅 여력을 상실하고 제네릭 등재 품목수는 감소해 오히려 보험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제약산업의 기반이 무너지면 산업공동화와 의약주권 상실, 신약 및 개량신약 R&D 프로젝트 중단, 인력 구조조정에 따른 고용불안을 야기할 것이다." (업계 관계자)
이날 워크숍 참석자들은 추가 약가인하에 대한 불합리성이 결국 제약업계 전체를 공멸로 몰아넣고, 보험재정에도 악영향을 줄 것이라는 우려속에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대한민국 의학전문지 헬스코리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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