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사랑과 애정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라고 해도 그 구성원들 간에 집단의 정의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 역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런 집단주의자들은 최근 우리사회 곳곳에서 축을 형성하면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각종 환경단체 등 시민단체, 혹은 직업군별로 나눠진 이익단체 등이 그렇다.
최근 일부 단체들이 내는 목소리를 보면 집단내의 회원들의 의사를 전부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같은 생각, 같은 직업적 경험, 동질감을 지니고 있어 어떤 외부의 힘보다 질긴 정신의 끈으로 결속되어 그 누구도 해체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하다.
마치 19세기 민족주의가 모든 민족은 정체성을 주장하고 운명을 추구하여 권리를 방어해야만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게르만 민족주의나 일본의 군국주의, 히틀러의 제3제국 등은 국민이 단일제국 속에 통합하여야 한다는 충족되지 않는 야망 속에서 번성하였다.
그러나 이런 극단의 도달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낭만적인 동경에 감염된 민족주의는 필수적으로 좌절감을 낳곤 했다.
어떤 민족주의자들은 음악이나 시 혹은 웅변으로서 민족주의의 감성을 불러일으키고 영웅을 만들며 광신적 애국주의를 양산하여 젊은 청춘들을 맹목적 믿음에 빠지도록 만들기도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 사상은 19-20세기에 발발한 대부분의 전쟁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민족상잔의 원인을 제공했다.
민족주의는 허위의 탈을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연히 지리적 배경이나 언어를 공유하게 된 사람들 사이에 타고난 정신적 유대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일부 학자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더욱이 글로벌시대를 관통하는 요즈음, 이런 민족주의는 매우 부적절하며 심지어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를 도치해 말해보면 집단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내부 문제조차 제대로 된 처방전을 내지도 못하는 일부 의·약학 관련단체들의 집단주의적 반대를 위한 반대는 표층에서 추출한 역학으로 심층을 정복하려는 어리석음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권력의 위기를 느낄 때마다 집단주의에 대한 향수의 효용 가치를 적절히 이용하려는 지도자의 트라우마가 작용하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반대를 통해 이미지를 강성화하거나 내부관리를 용이하게 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이들 단체들은 외부에서 원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체제의 강고한 내벽을 허물고 합리적이고 외부상식에 부합하는 주체로서 스스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야 정책만 나오면 반대를 하든, 마음에 들지 않는 관련부서와 한판 붙든, 탈퇴를 하든 해 볼 것 아닌가. (본지 논설위원/소설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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