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시절] 노인복지센터에서 진료 (62)
[그때 그시절] 노인복지센터에서 진료 (62)
원로 인사가 엮는 회고록-김희경
  • 김희경
  • chihak@paran.com
  • 승인 2010.03.15 04: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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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년간의 무료봉사는 한번도 빠짐없이 충실

▲ 의학박사 학위수여식에서 형님들과

[덴탈투데이/치학신문] 박우찬 선생으로부터 이곳 진료일은 매주 화요일과 토요일이고 화요일은 오전중에 치아 진료, 토요일은 오후 1시에 주로 의치(Denture)수리 보수를 하는데 어느 요일을 원하느냐는 질문에 화요일을 택했다. 그날부터 봉사 활동은 시작됐다.

봉사를 자원한 치과의사는 대부분 시내에서 개업하고 있는 젊은층의 회원이었는데 필자는 그 중에서 은퇴하고 제일 고령인 봉사회원이었다. 나는 충실하게 화요일 봉사치료에 전념했다. 화요일 봉사회원 출근 통지는 복지회관 치과진료소 간호사가 전화로 미리 연락을 해줬다.

분당 집에서 목적지까지는 1시간 30분 지하철을 이용한다. 분당선 수내역에서 지하철에 승차하여 수서역에서 3호선으로 갈아타고 안국역에 하차한다. 왕복 3시간을 지하철 신세를 진다. 하지만 해당일과 예정된 시간에는 한번도 지각이나 봉사일을 어긴일 없이 내 임무에 충실했다.

환자는 많았으나 열린치과의사회에서 어떻게 하라는 지침은 없었다. 그래서 신경치료 환자도 봐야 되는지는 필자의 판단으로 시행했다. 필자는 주2회만 환자치료를 하므로 신경치료 환자는 치료를 피하였고 개업의사들 입장도 생각해야 된다고 판단해 발치환자도 잔존치 경우는 발치를 하지 않았다.

자연 어느 치과의사는 발치 해주는데 왜 발치를 안 해주느냐고 반문하는 환자도 있으나 내생각대로 계속 실시했다. 진료소 근무중 불편한 것은 진료소 간호사가 자주 바뀐다는 점이었다. 복지회관 운영방침에 따라 직책에 변화가 있지만 간호사는 기술직원인데 다소 훈련을 해놓으면 바뀌곤 했다.

이건 개선되어야 한다. 하지만 개업 치과의사는 자기병원 간호사를 동행하는 회원도 있으니 내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되어 불편하지만 참으면서 봉사했다. 2005년도 12월 봉사를 끝으로 4년간의 복지회관 봉사도 끝을 맺으려고 결정했다. 내나이 82세였다. 왕복 3시간이란 지하철 승차시간과 15~16명 환자치료가 내겐 부담이 됐다.

점점 내가 할 일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한일 친선모임도, 일본동창회 회지에 보내는 번역원고, 노인복지센터 봉사도 모두 사라지고 앞으로는 ‘학수회’와 ‘동기생회합 춘하추동 만남’ 실향민 이북 고향인 회합 ‘성민회’ 만이 존속중이다. 흘러가는 세월을 막을 수 없으니 우리의 인생길 또한 무엇으로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이 시간에도 세월은 자꾸만 흘러가고 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길 그 누가 무엇으로 막을 것인가.

1974년 부산서 서울로 이사온지 꼭 1년. 1975년 11월 18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지난 1년간 이렇다할 효도도 못했는데, 좀 더 연명하셨으면 잘 해드릴 수도 있었는데, 필자가 그간 해 드린 것은 매주 토요일 노량진에 계신 부모님께 문안드리러 가는 것이 노력의 전부였는데, 때는 이미 늦었다.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미리 선언하셨다. 두 사람중에 한 사람이 먼저 가면 그때가서 어느 자식집으로 가겠노라고. 늙으신 부모님의 현명하신 판단인지도 모르겠다. 내게 커다란 교훈이 되었다. 우리 부부도 늙으면 부모님이 하신듯이 그 길을 택할 것이라 마음속으로 다짐하였다.

아버지는 애향심이 깊은 분이셨다. 고향 성천군민을 위한 성천군민회 10대 회장을 역임하셨다. 나는 서울로 이사와 고향 성천면민회에 참석하여 낙후된 면민회 재건에 이바지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면민회에는 고향 초등학교 동기생도 생존해 있었다.

그들과 회합하여 면민회 재건에 대한 상의를 하였다. 회명은 내 제안에 따라 성민회로 정하고 회장은 동기생 중에서 선출했고 일선에서 활약할 역원은 우리보다 젊은 층에서 선택했다. 얼마후 성천군민회에서 부회장직을 위임 받았으나 나는 군민회 보다는 면민회 재건이 더욱 시급하다고 판단해 성민회 고문으로 만족했다.

성민회 역원들은 성철농업전문학교 출신들이라 업무처리에 능숙하여 점점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내 큰형님은 고향에 계실 때는 자기가 전공한 농과계통에 종사하셨다. 일본 삿뽀로농과대학을 졸업하신 숙부님과 자주만나 농업에 대한 의견을 자주 교환 하신 것으로 안다.

농과계통을 졸업하고 즉시 ‘성척농장’이란 간판을 걸고 주로 밤 낙엽송 옷나무 등을 재배했다. 밤나무나 낙엽송은 1년생 2년생 등으로 구분하여 국내 만주 등지로 수출하였다. 또한 돼지와 호주산 염소도 키웠다. 돼지는 20여마리 염소는 50마리 정도였다. 봄철에는 염소의 털을 깎아서 공장으로 보내면 멋진 옷이 나온다.

그러한 사업을 하시다 38선을 넘어 서울로 정착한 후로는 직업을 180도 바꿔 상업을 택했다. 형님께서는 동생 두 명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들은 의사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건강에 이상이 없는 한 평생 그 기술로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나는 기술이 없으니 돈버는 것이 내의 평생 직업이라고. 동생인 우리 입장에서는 형님의 그 말씀이 백번 지당한 말씀이라고 생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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