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는 많다. 고은 시인은 ‘나는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취하기 위해 이 세상의 밤에 태어났다’는 단시로 술을 숭모(?)하기도 했다. 연극인 고(故) 이진수 선생은 거의 매일 대학로 1번지 술집에 앉아 선후배들과 어울렸다. ‘귀천(歸天)’의 시인 고(故) 천상병 선생은 술에 취해 소설가 신봉승 선생의 신혼집을 야밤에 쳐들어가기도 했다.
보들레르는 ‘개성의 증식수단으로서 비교해 본 포도주와 하시시’라는 글에서 술에 젖어 몽롱한 재즈클럽의 분위기를 묘사한 적이 있으며 프란시스 베이컨은 술 마신 다음날 오전에 그림을 그리는 습관을 가졌다
도연명과 이백, 그리고 두보로 이어지는 중국문학의 근본은 술과 함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술과 사상이 접목된 세계관의 유유한 여정이었던 것이다.
술의 미덕은 무슨 고상한 분위기나 맛이 아니라 취함에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취한다는 것은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으로의 접목인 것.
테네시 윌리엄스는 그의 희곡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노동자계층인 스탠리의 음주습관과 부르주아 잔재를 가지고 있는 블랑쉬의 음주습관을 잘 대비시키고 있다. 스탠리가 남성적인 형제애와 휴식을 찾는다면 블랑쉬는 술에서 자신의 불결한 과거와 막막한 미래를 잊고 그것들을 환상의 세계로 대체하는 수단을 찾는다. 이른바 술의 사회적 욕망이다.
그러나 술에 대한 아름답고도 낭만적인 추억들이 아른거릴지라도 술은 여전히 이율배반적이다. 술에 대한 자기파괴적 과정을 그린 작품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다. 주인공 쿠포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고 느끼는 순간, 주정뱅이가 된다. 이 책은 술이 인간을 피폐화시키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술은 인간을 돌처럼 굳게도 한다. 맬컴 라우리의 소설 ‘화산 아래서’ 같은 작품은 술로 인해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는 영사에 대한 이야기다. 피츠제럴드의 ‘아름답고도 저주받은 것’ 역시 부유층 자제가 음주벽으로 몸을 망치는 이야기가 주제다. 모두 술의 해악을 경고하는 명작들이다.
마침 우리 사회의 음주 풍속에 대한 세간의 논쟁을 지속시켜 줄 보고서 하나가 눈에 띈다.
주류전문지 ‘드링크스 인터내셔널’이 최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술 1위와 3위에 한국 소주가 올랐다.
보고서는 지난해 한국의 진로 소주가 6138만 상자가 팔린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미국 보드카 스미르노프(2470만 상자)보다 거의 3배나 많다. 3위를 차지한 롯데 소주는 2390만 상자가 팔렸다.
유독 술에 대해 관대한 우리사회의 이면을 보는 것 같다.
남녀 불문하고 2,3차에다 노래방까지 가야 끝을 보는 지금의 음주문화는 분명 지나치다. 우리 모두가 자숙해야 할 때이다. (본지 논설위원/소설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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