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인 유일한 박사④] 아메리칸 드림 이룬 청년사업가
[제약인 유일한 박사④] 아메리칸 드림 이룬 청년사업가
  • 박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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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23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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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1919년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 박사는 제너럴일렉트릭(GE)에서 회계사로 일을 하게 된다. 동양인이 회계사로 일을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드문 경우였다. 제너럴일렉트릭이 유 박사의 능력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유일한 박사는 제너럴일렉트릭에서 유감없이 능력을 발휘했고, 회사는 유 박사를 신임해 동양 판매 총책임자를 맡아달라고 제안했다. 글로벌 시장에서 원대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유 박사에게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청년 유일한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제의 침탈로 수난을 겪고 있는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면 혼자만 잘 먹고 잘 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제너럴일렉트릭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경제적 기반을 닦아 그 경제력을 가지고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선택한 길은 숙주나물 재배와 판매업이었다.

당시 중국식 만두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중국인과 유럽인들에게 각각 주식이자 별미였을 정도로 수요가 많았다. 숙주나물은 중국식 만두에 들어가는 필수재료였으나 미국에서 녹두를 생산하고 재배하는 곳이 적어 늘 공급이 부족했다.

철저한 시장조사를 바탕으로 시작된 숙주나물 재배 및 판매사업은 큰 성공으로 이어졌다. 소규모 가내공업으로 출발했던 사업이 판로가 확대되면서 어느덧 기업의 형태로까지 커졌다.

이때 유일한 박사는 숙주나물을 유리병이 아닌 통조림에 파는 아이디어를 선보였다. 유리병은 운반과정에서 파손되기 쉬웠으며, 오랫동안 신선도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는데 이를 개선한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직접 숙주나물 통조림과 중국 간장을 들고 미국 가정을 찾아다니며 요리법을 설명하는 등 평생고객 확보에 나섰다. 그 결과 유 박사의 숙주나물을 선택하는 구매층은 넓어졌고 그의 사업은 번창해나갔다

숙주나물 사업이 성공하자 유일한 박사는 소규모 기업에서 탈피하고자 결심했다. 혼자서 모든 일을 다하기엔 역부족이라 생각했다. 유일한 박사는 대학 친구였던 월레스 스미스를 찾아가 그에게 시설투자 자금을 부탁한다. 월레스는 평소 유일한 박사의 사업적 재능과 성공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지라 부탁을 흔쾌히 들어줬고, 유 박사와 함께 더 큰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렇게 세워진 회사가 1922년 탄생한 라초이 식품회사다. 그의 나이 27세였다. 

 

유일한 박사, 호미리 여사와 결혼하다

유일한 박사와 호미리 여사.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와 호미리 여사. (사진=유한양행)

안정된 직장을 얻으면서 유일한 박사는 결혼과 가정을 생각하게 된다. 이때 만났던 여성이 바로 유 박사와 평생을 함께한 호미리 여사다.

호미리 여사는 중국계 미국인으로 그의 부친은 서부 철도 건설의 중책을 맡으며 미국으로 이주해 왔다. 덕분에 호미리 여사는 어렸을 때부터 미국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호미리 여사는 미시간대학을 졸업하고 코넬대학으로 옮겨 의학 공부를 마친 뒤 소아과 전문의로 활동했다. 동양 여성으로서는 최초였으며, 미국에서 의사 자격증을 받았을 정도로 우수하고 학구적이었다. 

유일한 박사와 호미리 여사의 첫 만남은 미시간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한·중 학생회 회장직을 맡았던 유 박사는 호미리 여사와 친구로 만나게 된다.

본격적인 교제가 시작된 것은 GE 근무시절이었다. 당시 호미리 여사는 대학과 병원 때문에 몇몇 지역을 전전했고, 이때 유일한 박사는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그녀를 대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유일한 박사가 미국에서 숙주나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있을 때 호미리 여사와의 만남은 더욱 진지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고 1925년 유일한 박사의 나이 30세가 되던 해에 호미리 여사와 평생을 약속한다.

호미리 여사는 유일한 박사에게 있어 단순히 아내이자 반려자가 아닌 그 이상의 존재였다.

유일한 박사와 함께 한국으로 온 호미리 여사는 우리 민족을 위해 약품 개발에 매달렸으며, 결국 자체 제작 제품 1호인 ‘안티푸라민’을 만들었다. 또 유한양행 창립 당시 약품을 대량으로 수입해 공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호미리 여사가 의사였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뿐만 아니라 호미리 여사는 소아과 병원을 개원해 저렴한 가격으로 환자를 치료했을 정도로 유일한 박사와 함께 우리 민족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다.

유일한 박사가 평생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부인 호미리 여사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일한 박사, 21년 만에 조국을 방문하다

라초이 식품회사 전경. (사진=유한양행)
라초이 식품회사 전경.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이야기는 다시 라초이 식품회사를 설립한 192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라초이 식품회사의 녹두 및 숙주 판매사업은 연일 대박행진을 이어갔고 급기야 미국 안에서 필요한 녹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을 정도였다. 

이를 고민하던 유일한은 결국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지역에서 녹두를 수입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계기로 조국인 한국을 방문하기로 결심한다. 21년 만에 찾는 조국이었으나 그는 쉴 겨를도 없이 중국의 여러 지역을 방문해 녹두를 대량으로 사들였다.

이때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다. 중국에서 녹두를 구매할 당시 유 박사는 규모가 작고 허름한 곡물상 노인과 거래 계약을 맺었다. 당시 이 노인과 맺은 계약이 워낙 많은 양이다보니 대량의 녹두를 공급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계약을 끝내자 곡물상 노인은 유 박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 제안에 흔쾌히 응한 유 박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약속한 시간에 맞춰 호텔 정문에 나서니 곡물상 노인이 보낸 롤스로이스 승용차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용차를 타고 노인의 집을 찾은 유 박사는 궁전과 같은 큰 저택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람을 금치 못했다.

훗날 유 박사는 중국 친구들에게 중국의 기업문화를 전해 듣고 나서 그 노인의 사업 모습과 평소 모습이 다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노인이 허름한 소매상으로 위장한 것은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기업인들이라면 정당한 세금을 내야 하고, 그 세금으로 국가가 번영해야 기업들이 더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탈세 현장을 접한 셈이다. 이 일을 계기로 청년사업가 유일한은 ‘기업과 세금의 바른 길’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유한양행이 훗날 모범납세업체로 포상을 받고 유일한 박사가 동탑산업훈장을 수여받은 것도 이때 얻은 경험으로 납세의무를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일을 마친 유일한 박사는 다시 고국땅을 밟았다. 그러나 그가 마주친 조국의 현실은 참담했다. 일제는 토지와 재산의 몰수 등 경제침탈을 가속화했고 일본인들이 설립한 학교에서는 한국 아이들을 일본인으로 교화시키는 데에 목적을 둔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유일한 박사의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열악한 보건상태’였다. 의사가 부족하다 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지 못해 죽어갔으며, 의약품이 부족해 흔한 폐결핵조차 치료하지 못하는 현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비규환이 된 조국의 광경을 목격한 청년 유일한의 머리속에 더 이상 미국 식품회사는 없었다. 오로지 굶주리고 병든 조국과 민족을 돕고자 하는 열망만 가득했다.

이때 유일한 박사는 또다른 조력자를 만나게 된다. 바로 세브란스 병원의 에비슨 박사다. 에비슨 박사는 유일한 박사에게 미국인으로서 보고 느낀 한국의 실정을 소상히 알려줬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는 의약품이 부족하므로 이를 수입하는 일이 필요로 하다는 조언을 전한다.

당시 조국과 동포를 위한 마음은 그 누구보다 뜨거웠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몰랐던 유일한 박사에게 에비슨 박사의 조언은 가뭄에 단비와 같았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병들고 굶주린 동포들을 위해 봉사하겠다.” 유일한 박사는 굳은 결심과 함께 다시 미국행 배에 올랐다. 꿈을 키워온 미국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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