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 / 곽은영 기자] “국가가 비겁하다. 위험과 책임을 외주화하고 있다.”
2일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사무실에서 열린 ‘안전하고 편견없는 사회를 위한 중증정신질환 정책제안’ 기자회견에서 나온 말이다.
지난해 말 진료하던 환자에게 목숨을 잃은 임세원 교수 사건을 비롯해 지난달 진주 방화·살인사건과 창원 아파트 살인사건, 1일 부산 조현병 환자의 친누나 살인사건 등 정신질환자에 의한 사건·사고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관련 학회가 진화 작업에 나섰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2일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중증정신질환국가책임제 도입을 골자로 한 ‘중증정신질환 정책 백서’를 발표했다.
학회가 제안한 5가지 최우선 과제는 ①중증정신질환 국가책임제 구현 ②보건복지 시스템의 이중 취약성 극복 ③다학제 집중사례관리 도입 ④의료기관-정신보건센터-경찰-법무부간 4각 공조체계 구축 ⑤정신보건예산 전체 5% 수준 확보 등이다.
권준수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장은 “조현병은 급성기 상태에서 자타해 위험을 일으킬 수 있지만 시기 적절한 치료로 예방할 수 있는 만큼 과연 환자에게만 죄를 물을 수 있는지, 우리 사회에는 죄가 없는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라며 “일련의 사건이 발생한 책임은 우리 사회의 미비한 중증질환자 치료케어 시스템에 있다”고 말했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의 자료에 따르면, 조현병 환자의 초기 정신병적 증상은 항정신병약물을 복용하면 한 두 달 내 70% 이상에서 개선 효과가 나타난다. 중증 정신질환자는 조기 집중 치료를 받고 중단 없이 지속치료를 받을 경우 증상과 기능 회복으로 정상적 생활도 가능하다. 문제는 치료가 지연되거나 중단되었을 때 증상 만성화와 함께 기능 퇴행이 초래된다는 것이다.
중증정신질환의 정상화를 위해서 급성기에는 집중치료를, 유지기에는 지속치료를, 회복기에는 복지서비스를 하는 등 ‘회복지향적’ 보건의료복지 서비스체계 구축이 원칙이다.
이동우 정책연구소장은 “국내에서는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 등으로 이러한 원칙이 구현되지 못한다”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차별은 치료지연을 초래해 증상 악화와 사고 발생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부정적 인식과 편견의 확대라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이동우 소장은 “저수가로 인해 지난 10년간 상급종합병원 및 종합병원의 급성기 병상이 400병상 이상 감소해 약 5000명의 환자가 집중치료 후 빠른 회복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면서 수가 문제와 급성기 병상 붕괴 문제를 지적했다.
학회는 급성기 뿐 아니라, 치료유지기에 지역사회 연결 인프라 부족으로 치료 중단에 의한 재발이 발생한다는 점과 회복기에 만성화된 환자들을 위한 충분한 고강도 치료가 이뤄지지 못한다는 문제도 제기했다.
학회는 중증정신질환 보건복지 시스템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국가책임제 구현과 환자 가족의 건강권과 인권을 충족시킬 사법입원제도 도입을 제시했다.
사법입원제도는 보호의무자가 아니더라도 정신질환의 강제입원을 요청할 수 있고 법원 등 사법기관이 입원 여부를 판단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의료계에서는 그동안 정신질환자의 강제입원을 가족에게만 전적으로 맡김으로써 보호자의 책임이 과중하다는 지적을 계속 해온 바 있다.
이동우 소장은 “보호자에게만 무한책임을 강요하는 보호자 동의 입원을 폐지하고 응급, 비자발입원, 외래치료에 대한 치료비 지원이 필요하다”면서 “보호의무자의 책임이 가중되고 있는 만큼 국가공공체계에 의한 입원 결정 제도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