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치과의사 모녀의 죽음과 진실
어느 치과의사 모녀의 죽음과 진실
  • 홍영균 변호사
  • admin@hkn24.com
  • 승인 2009.06.05 1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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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 판례는 아닙니다. 6년 전 판결이지만 지금까지도 여운을 남기는 형사판결입니다. 대법원은 2003년 2월 26일 부인과 딸을 살해한 혐의로 8년간 재판을 받아 온 외과의사 L씨에 대해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의 공소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직접증거가 없고,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간접증거인 피해자들의 사망시각에 관한 증거의 증명력이 환송 뒤 원심에서 새로 조사된 스위스 법의학자의 증언이나 화재재현실험 결과 등에 의해 크게 줄어 들었고 나머지 간접증거를 모두 종합해 보더라도 공소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명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사건은 1995년 6월12일 아침 8시40분에서 50분 사이에 서울 불광동 M 아파트에서 발생했습니다. 화재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은 오전 9시 30분쯤 화재를 진압했는데 이 화장실 욕조에는 따뜻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물 위에는 이집 안주인인 C(치과의사)씨와 한살배기 딸이 숨진 채 떠 있었습니다. C씨의 시신 목에는 끈으로 졸린 흔적이 뚜렷했고, 상하의는 벗겨져 있었으며 팬티는 무릎 부근까지 내려와 있었습니다. C씨 손가방에 있던 현금과 수표 50여만원은 그대로 있었고 방을 뒤진 흔적은 없었습니다. 이 집의 나머지 한 식구인 가장 L(외과의사)씨는 이날 정식으로 개원하는 자신의 외과의원으로 출근한 후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30대의 여치과의사와 말도 잘 못하는 한살짜리 아기까지 잔혹하게 목졸라 죽인 후 따뜻한 물을 욕조에 담아 담가두고, 안방에 불까지 지른 후 돈이나 귀중품은 훔쳐 가지 않은 범인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수사 초반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은 이 사건 L씨 그리고 숨진 C씨와 불륜 관계에 있었던 J씨였습니다. 수사기관은 J씨가 사건 발생일 새벽부터 아침 사이에 회사 여직원 K양 집에 있었다는 알리바이가 있음을 이유로 L씨를 범인으로 판단했습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은 모녀의 사망시각과 L씨 출근 시각의 선후 문제였습니다. L씨는 재판받을 때까지 일관되게 자신은 그날 오전 7시에 출근했고, 그 때까지 부인과 딸은 살아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부인 C씨는 그 전에 사망했을 것이라는 것이 법의학적인 소견이었으므로 수사기관은 L씨를 용의자로 지목한 것입니다.

검찰은 시체를 뜨거운 물 속에 넣어서 시신을 통한 사망시각 추정에 혼선을 준 점, 안방 장롱에 불을 지르면서 안방문을 열지 않아 소량의 공기가 공급되게 함으로써 천천히 화재가 진행되는 지연 화재를 낸 점 등으로 보아 고도의 의학적, 과학적 지식을 갖고 있는 지능범이 범인이고, 이는 바로 외과의사인 L씨라고 보았습니다. 지연 화재를 낸 것은 L씨가 자신이 출근 후 화재가 발견되도록 알리바이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었다는 게 검찰의 시각이었습니다.

결국 L씨는 살인과 현주건조물 방화 혐의로 기소됐고 1심에서는 사형, 2심에서는 무죄, 대법원에서는 유죄 취지의 파기 환송 등으로 승패가 엇갈렸습니다. 특히 2심인 고등법원과 3심인 대법원에서는 진범이 누구냐를 놓고 치열하게 논전을 벌였습니다. 양측성 시반, 시강, 위 속 내용물 상태, 화재시각 등에 관한 검찰과 변호인의 시각차, 그리고 L씨 우측 팔의 손톱자국 상처와 J씨의 알리바이에 대한 논란, L씨에게 불리할 수 밖에 없었던 C씨의 콘택트 렌즈 그리고 거짓말 탐지기 결과는 무죄와 사형이라는 첨예한 대립각 선상의 구성 요소였습니다.

목숨을 담보하는 사법부의 재판과정에서 왜 사형과 무죄라는 극과 극의 판결이 나타나는 것일까요? 국가는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고 지켜야할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대법원은 간접증거만으로도 유죄 판결이 가능하다는 취지의 판결을 선고했습니다. 기존 대법원의 표현은 검찰과 경찰이 철저한 초동수사와 수사의 과학화를 통한 진범 잡기보다는 정황에 의해 범인을 만들어 왔던 수사관행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살 소지가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될지 상상하기 조차도 싫습니다.

이 사건의 중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정황증거만으로도 선량한 시민이 감옥에 갇히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사로서의 양심 내지 소양이나 윤리를 무시하고 오직 의학지식을 가진 자로서만 평가했다는 점, 초동수사를 부실하게 해서 사실만 밝히고 진실을 못밝혔다는 점을 반성하면서 국제 법의학계 회장인 버나드 나이트 박사의 충고, 즉 스위스나 유럽처럼 범죄현장에 반드시 법의학자들이 나가서 직접 증거를 수집하고 법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수사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범죄 발생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리고 재판 단계에 이를수록 진실은 멀어지고 사실만 남게 되는 현실, 그리고 육감을 합리적 수사라고 강변하는 수사기관의 간판사기에 넌더리가 나기 때문입니다. <헬스코리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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