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인 유일한 박사⑥] 다시 독립투사로 나서다
[제약인 유일한 박사⑥] 다시 독립투사로 나서다
  • 박정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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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7.3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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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유일한 박사는 1926년 유한양행을 설립한 이래 6년이라는 시간을 쉼 없이 달려왔다. ‘약’(藥)이라고 하면 누구나 ‘버들표’를 떠올릴 정도로 당시 유한양행의 의약품은 큰 인기를 끌었다. 병원과 약국이 있는 곳이면 험지(險地)도 마다하지 않고 찾아다니며 마케팅을 해온 결과였다.  

이때가 1932년. 유일한 박사는 급기야 사세 확장에 따른 사옥 신축에 나섰다. 그는 서울 신문로 언덕 쪽에 160평 규모의 대지를 매입하고 그곳에 2층 양옥을 새로이 지었다. 작지만 사옥이 있다는 것은 유 박사 본인이나 직원들에게 큰 자부심이었다.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던 유 박사는 그 자부심을 헛되이 하지 않았다. 그는 곧바로 백신사업에 뛰어들었다. 문제는 냉장시설이었다. 당시만 해도 냉장시설 보급은 흔한 일이 아니었기에 변질되기 쉬운 백신 의약품은 취급하기 어려웠다. 특히나 지방 같은 경우는 백신 보급이 쉽지 않아 환자들은 죽음의 문턱에서 사투를 벌이기 일쑤였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유 박사는 유한양행 본점에 냉장시설부터 갖추었다. 자금면에서 큰 부담이 따르는 것이었지만, 병든 국민을 살리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이었다. 유 박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보관된 백신을 언제든 전국에 공급할 수 있도록 ‘24시간 근무제’도 도입했다. 한밤중에라도 지방에서 백신이 필요하다는 연락이 오면 당직을 서던 직원은 백신을 가지고 서울역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연락을 받은 지방으로 가는 기차의 기관사에게 백신을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고, 기차가 목적지에 도달하면 대기하고 있던 병원 직원이 그 백신을 받아 환자에게 공급했다.

당시 유일한 박사가 내린 결정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수익은커녕 팔면 팔수록 손해만 보는 것이 백신사업인 까닭이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인간 유일한의 남다른 ‘애국애족’(愛國愛族) 정신을 느낄 수 있다. 

 

제약주권의 신호탄 ‘안티푸라민’ 개발 

안티푸라민 초창기 제품 

수입의약품 판매만으로는 제약주권과 국민보건 향상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유일한 박사는 한편으로 자체 의약품 개발에도 열정을 쏟았다. 첫 작품은 진통소염제인 ‘안티푸라민’ 이었다.

유 박사는 의사이자 부인인 호미리 여사의 도움을 받아 1933년 ‘안티푸라민’을 개발했다. 녹색 철제 캔에 담긴 연고 형태의 ‘안티푸라민’은 멘톨, 캄파, 살리실산메칠로 등을 주성분으로 담아 소염진통, 혈관활장, 가려움증 개선 등에 탁월한 효과를 보였다. 다량의 바세린 성분을 함유해 보습 효과도 뛰어났다. 현대 의약품이 흔하지 않았던 당시, 사람들은 이 약을 만병통치약처럼 애용했다.

퇴행성관절염(골관절염), 어깨관절주위염, 건·건초염, 건주위염, 상완골상과염(테니스 엘보우 등), 근육통, 외상후의 종창·동통 등 아프다 싶으면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이 약을 발랐다. 

 

소사 공장 전경. (사진=유한양행)
소사 공장 전경.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의 도전은 ‘안티푸라민’ 개발에서 멈추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의약품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위해 제약 공장 건립을 결심했다. 1936년. 유 박사는 경기도 부천 소사에 2만평의 대지를 매입해 공장 건설을 착수했다. 그는 공장 건설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기본공사가 끝나는대로 의약품을 생산했고, 시설이 증가하는대로 또 다른 의약품을 생산했다.

첫 생산시설인 소사공장이 완공되기까지는 5~6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유 박사는 이곳에 제약회사가 갖춰야 할 각종 시설은 물론이고 상하수도 시설, 독신자 사택, 회의소, 운동장, 화원, 수영장, 동물 사육장, 심지어 사원들의 집회장소까지 마련했다. 사원들에 대한 그의 배려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약 생산시설을 갖춘 유일한 박사는 국민 보건 운동의 향상과 생산성 촉진, 차기 제품 판촉 운동, 신제품 연구개발 등의 노력을 종합적으로 유도해 나갔다. 직원들의 협조와 창의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 조성 노력도 함께 했다.

 

유한양행, 주식회사 전환 · 종업원지주제 실현

1936년 유한양행 주식회사 발족을 마치고 난 후 직원들과 함께 촬영한 기념사진. (사진=유한양행)
1936년 유한양행 주식회사 발족을 마치고 난 후 유일한 박사(앞줄 왼쪽에서 네번째)가 직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는 평소 “기업은 개인의 것이 아니며 사회와 종업원의 것이다”라는 기업 경영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유 박사의 철학은 유한양행 설립 이래 10년간 이어져온 개인기업을 법인으로 바꾼 주식회사로 구체화됐다. 나아가 1939년에는 자신의 재산을 정리해 직원들에게 지분을 분배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종업원지주제를 실현했다. 

이는 오로지 유일한 박사의 신념이 낳은 결과였다. 그는 유한양행 설립 당시부터 “기업이 영세할 때는 개인 소유 회사로 머물러도 괜찮으나 기업이 크게 성장해 사회적 위치와 기여도가 커지면 주식회사로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기업은 기업대로 성장할 수 있고, 사회는 그 기업을 믿고 후원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의 발로였다.

 

일본 제약계와 싸워 이기다

유일한 박사가 생산시설 건립과 함께 사회적 기업이라는 경영철학을 실천에 옮기는 동안 유한양행의 제품들은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경이적인 판매량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당시 유한양행은 만주와 중국 본토, 중국 서북부, 대만, 일본 오사카 지역까지 판매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자체 생산한 안도린, 안티프라민, 네오톤 같은 주력 의약품은 이들 시장에 진출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피를 맑게 해주고 기운을 보충해주는 강장제 ‘네오톤’은 중국과 만주 지역에서 일본이 대항마로 내세운 ‘부르도제’를 압도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의약품 대결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당시 새로운 의약품에 관심이 많았던 유 박사는 독일의 도마크 박사가 개발한 ‘GU사이드’라는 치료제의 정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이 약물을 신속하게 한국에 도입했다. 유럽 지역을 여행할 때 관계를 맺은 현지 제약회사들 덕분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와 동양 일대에는 세가지 망국병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성병으로 불리는 임질이었다. GU사이드는 그 임질을 치료하는 약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포도상구균, 간염구균, 골수막염균, 대장균, 파상풍균 등 병원성 균에 의한 질병에도 광범위하게 효능을 발휘했다.

유 박사는 탁월한 효능의 이 약물을 만주와 중국 일대에 유통했다. 유한양행의 시장 확대에 당황한 일본 제약계는 GU사이드와 대결하기 위해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했으나 이미 아시아 일대에서는 유한양행의 아성을 넘어서기에 역부족이었다.

 

기업가 유일한 다시 독립운동에 나서다

맹호군 관병식 모습. (사진=유한양행)
맹호군 관병식 모습. (사진=유한양행)

유한양행이 공장을 설립하고 아시아시장에서의 영향력을 넓히고 있던 1938년. 유 박사는 한국을 떠나 잠시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오래전부터 꿈꿔온 ‘수출입국의 초지(初志)’를 관철하기 위해서다.

수입과 판매는 초창기 기업의 필수과제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은 생산과 수출에서 그 결실을 본다. 생산은 기술 향상과 고용증대를 복돋아 주고, 수출은 국가의 부를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 박사는 수출 판로 개척이라는 사명을 가지고 미국행 배에 올랐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사다. 1941년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며 미해군의 주요기지 였던 진주만에 기습적인 폭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 일로 미국과 무역을 준비하던 유일한 박사의 기대와 꿈은 깨어지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서울과의 통신마저 끊어졌다. 이때 유일한 박사에게 다시금 항일투쟁의 기회가 찾아온다. 태평양 전쟁에 말려든 미국이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 한·중·일 등지의 지리와 언어, 풍속을 비롯해 정치와 경제 등에 높은 식견을 가진 유일한 박사에게 한국담당 고문역을 제안한 것이다.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미 국무부의 제안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가 1942년. 그의 나이 47세였다.

미군 작전수행 정보고문으로 들어간 유 박사는 이후 2년 반 동안 미군에서 일하면서 일본을 물리치기 위한 각종 아이디어를 미군측에 제공했다.

뿐만아니라, LA에서 재미 한인들로 무장한 맹호군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한 것은 물론 1945년 3월부터 8월까지는 미육군전략처(OSS)의 냅코 작전(NAPKO Project)의 특수공작원으로서 제1조 조장을 맡기도 했다. 냅코 작전은 재미한인들로 구성된 공작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국토를 수복하는 작전으로, 당시 유일한 박사는 50세라는 적지않은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며 조국 독립활동에 투신했다.

냅코 작전은 그해 8월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우리나라가 해방을 맞이하면서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았다. 1급 군사기밀이었던 냅코 작전 계획은 유일한 박사가 생전에 입밖에 내지 않아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으나 그가 세상을 떠난지 20여년 뒤 사실이 밝혀지면서 정부는 1995년 유 박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조국의 해방 소식을 들은 유일한 박사는 “이제부터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살 때가 됐다”며 일제의 모진 탄압을 받았던 유한양행을 재정비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해방 직후 유 박사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캄캄한 어둠 그 자체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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