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인 유일한 박사③] 미국에서 울려 퍼진 20대 청년의 독립 함성
[제약인 유일한 박사③] 미국에서 울려 퍼진 20대 청년의 독립 함성
  • 박정식 기자
  • admin@hkn24.com
  • 승인 2019.07.1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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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민족기업 유한양행 창립자 유일한 박사. (사진=유한양행)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아래 민족기업 유한양행을 창업한 유일한 박사. 그는 새로운 기업 윤리를 이 땅에 뿌리 내린 기업가이기에 앞서 일제 강점기 시절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우리나라 해방을 위해 온몸으로 싸워온 독립운동가였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는 생전에 자신이 해왔던 많은 일들을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오로지 정직과 신뢰가 담긴 행동을 실천에 옮겼을 뿐이지만, 그의 희생적이고 빛나는 업적은 각종 자료와 문헌,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 의해 후대에 전해지고 있다. 지금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격동의 시대를 맞고 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족의 혼을 일깨운 유일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일지도 모른다. 유일한 박사의 정신적 유산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전해질 수 있도록,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편집자 주]

[헬스코리아뉴스 / 박정식 기자] 9살 어린 몸으로 홀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대학까지 졸업한 유일한 박사. 그가 대학에 진학한 뒤 보인 행보는 비범함 그 자체였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장사 수완을 발휘해 꽤나 큰 돈을 벌었으며, 선배들을 도와 독립운동에도 가담하는 굳은 의지를 보였다.

헬렌 켈러에게 스승이자 조력자인 앤 맨스필드 설리반 선생이 있었듯, 유일한 박사는 꿈 많던 젊은 시절 3명의 중요 인물을 만나게 된다. 그 중 한 명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서재필 박사다.

 

비범함을 보인 21살 청년

1915년 가족들에게 송금한 돈을 갚기 위해 1년간 학업을 중단했던 유일한 박사는 다음 해인 1916년 가을, 디트로이트 부근 앤아버에 자리한 미시간 대학에 진학하며 본격적인 대학 생활을 시작한다.

대부분의 미국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유일한 박사 역시 스스로 학자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여기서 유일한 박사의 비범함을 엿볼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은 대부분 청소나 식당 웨이터, 접시닦이, 일부 교수들의 조수로 연구를 돕는 일들을 찾았다. 이 같은 일들에는 특징이 있으니, 바로 고정적으로 수입은 벌어들일 수 있으나 시간에 많은 제약을 받는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을 주목한 유일한 박사는 시간 제약은 덜 받고 노동 강도에 비해 수입이 월등히 많은 일을 택하게 된다. 바로 ‘장사’다.

학자금과 생활비 마련을 위해 장사를 택한 유 박사는 먼저 시장조사에 나섰다. 당시 앤아버 지역에는 중국인을 비롯한 동양계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 이를 주목한 유 박사는 중국에서 들여온 손수건과 유단 카펫 같은 것을 팔기로 결심한다. 오랜 시간 고국을 떠나온 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물건이 잘 팔릴 것이라 생각했던 것.

결과는 이른바 대박이었다. 그가 파는 물건들은 금세 동이 나버렸고, 주문이 쇄도해 혼자서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장사의 성공으로 유 박사는 다른 학생보다 월등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으며, 금전적으로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됐다.

유 박사가 대박을 터트릴 수 있었던 이유가 오랜 타향살이에 지친 이들의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물건을 선택한 것만은 아니다. 고객에 따라 판매 전략을 달리했다는 점도 큰 성과를 올리는데 주효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고객을 대하는데 진심을 다했으며, 신의를 잃지 않기 위한 노력까지 더해졌다는 것 역시 빼놓아선 안 될 중요한 부분이다.

유일한 박사가 고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창업하고, 자신의 역량을 국제 무대까지 확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런 경험과 자신감이 큰 자산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대학교 4학년생, 한인자유대회서 중책을 맡다

한인자유대회를 마친 후 시가 행진을 하는 모습. (사진=유한양행)
한인자유대회를 마친 후 시가 행진을 하는 모습. (사진=유한양행)

유일한 박사가 대학에 진학했던 시기. 우리나라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1910년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긴 이후 무단통치가 강화되면서 일제는 헌병 경찰을 전국에 배치해 우리 민족을 탄압했고, 집회와 결사의 자유 같은 기본권마저 빼앗아 갔다. 이에 대항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체포돼 투옥됐으며, 독립운동 단체들은 해산되거나 중국 등으로 거점을 옮겨야 했다.

몸은 비록 이역만리에 있었지만 내 나라의 처참한 현실은 불타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던 청년 유일한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리고 1919년 3월1일.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남을 일대 사건이 하나 발생한다. 조선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해 한일합방조약의 무효와 독립을 선언하는 비폭력 만세운동인 3·1운동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유일한 박사는 좌시하고 있을 수 없었다. 3·1운동의 정신을 받들어 일본의 탄압으로 생존권을 유린당하고 있는 동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안겨줘야한다고 생각했다.

“애국은 실천이지, 말이나 선전이 아니다.” 청년 유일한은 서재필 박사 등과 함께 1919년 4월14일부터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한다.

당시 대학교 4학년이었던 유 박사는 이 대회에서 ‘한국 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선언하는 결의’ 작성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이 결의문은 한인자유대회에서 가장 중요했다. 조국의 꿈과 미래를 기약하는 내용이 담겨야 했고, 후일 임시정부가 완전한 독립정부가 됐을 때 이 결의문이 입헌 정신이 될 수도 있기에 신중해야 했다.

결의문 작성과 발표의 대표자가 된 청년 유일한은 평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신념을 10개의 조항으로 담아냈다. 이 조항은 훗날 조국으로 돌아온 유일한 박사가 평생을 걸어온 길과 일치한다.

유 박사는 민중이 주도하는 민주주의를 제창하면서 ‘민중교육 선행’을 강조했다. 민중교육 선행이 갖춰져 있지 않으면 민주주의 구현은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후일 그가 교육과 교육기관에 열정을 쏟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겠다. 

철학자이자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인 김형석 교수는 한인자유대회에 참가한 유일한 박사에 대해 이 같은 평을 남겼다.

“자유대회에 참여한 독립 인사들은 많았다. 하지만 유일한 박사와 같이 실천에 옮긴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역사적 사건을 결과로만 따져본다면 유 박사는 언제나 언행이 일치되며, 생각한 바를 실천에 옮기는 의지와 신념의 사람이었다.”

 

공업·산업 발전의 중요성 깨닫다

미시간 대학 4년 동안 유일한 박사는 많은 것을 배우고 체험했다.

서재필 박사와 장덕수, 김도연, 이대위와 같은 선배들과의 교류를 통해 조국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됐다. 학교 내에서는 ‘한국학생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한국을 비롯한 다양한 동양인들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됐다. 이 당시의 경험이 후일 대인관계와 지도력을 증진하는 좋은 계기가 됐을 것으로 보인다.

공업과 산업 발전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깨닫게 된다.

유 박사가 다니던 미시간대학교는 자동차 공업도시인 디트로이트와 가까웠다. 그가 한인자유대회 참가를 위해 방문했던 필라델피아 역시 산업의 중심지였다.

이들 도시가 발전할 수 있던 원동력을 두 눈으로 확인한 유 박사는 “산업적 기반 없이 근대국가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다.

1919년 미시간 대학을 졸업한 24살 청년은 훗날 인생에 있어 중대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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