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코리아뉴스 / 이순호 기자] 의약품을 허가받은 범위 외로 사용할 때 정부의 승인을 받도록 하는 ‘의약품 허가초과 승인 제도’가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고 있다. 제도가 생긴 지 10년이 넘었으나, 최근 급여권에 들어온 키트루다 등 면역항암제의 오프라벨 사용이 논란이 되자 여기저기서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지난달 MSD의 면역항암제 ‘키트루다’(펨브롤리주맙)과 오노약품공업·BMS의 면역항암제 ‘옵디보’(니볼루맙)가 허가받은 적응증 외 6개 암종에 대한 사용을 승인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키트루다는 위암, 비호지킨림프종, 직결장암 등 3가지 암종, 옵디보는 위암, 간세포암, 항문암 등 3가지 암종에 대한 단독요법 사용을 승인받았다.
이번 승인은 기존과 달리 매우 신속히 이뤄졌다. 애초 10월 중순경 열릴 예정이었던 암질환심의위원회 회의가 지난 9월18일에 앞당겨 개최돼 곧바로 이들 6개 암종에 대한 허가초과 사용을 승인했다.
면역항암제 오프라벨 사용에 대한 암 환자들의 요구가 빗발치고 시민단체, 언론, 온라인 등 여러 곳에서 정부를 질타하는 여론이 형성되자 보건복지부와 심평원이 승인을 서두른 것으로 풀이된다.
복지부 관계자는 “(의약품 허가초과 승인 제도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시행하고 있는 제도”라며 “기존에 없던 제도가 아닌 만큼 환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면역항암제를 사용하려는 환자들의 요구가 많아 절차를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며 ”현재 심평원은 면역항암제와 관련된 민원과 업무로 다른 일을 못할 지경이고, 복지부 관련 부서도 비슷한 이유로 매우 바쁜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안전성 對 사용 이익 … 환자-정부 의견 충돌
허가초과사용 승인제도는 급여 적용을 받는 의약품을 허가받은 범위 외로 사용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 등으로부터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제도다. 그러나 환자의 상태와 비용 부담 등을 고려하지 않은 채 일률적으로 제도를 적용하다 보니 잡음이 적지 않다.
일례로 이번 면역항암제 허가초과 사용과 관련, 일각에서는 말기 암 환자가 약을 쓰지 못해 사망에 이르는 것보다 더 큰 부작용이 있느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한시가 급한 말기 암 환자에게까지 안전성을 확보하겠다며 면역항암제 사용 승인을 받게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주장이다.
항암제는 약을 먼저 사용한 후 사후 승인을 받는 다른 의약품과 달리, 약을 사용하기 전에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허가범위 외 비급여로 사용할 수 있다. 병원의 다학제위원회를 통과한 후 식약처로부터 안전성에 관한 검토의견을 받고 심평원이 승인을 해주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말기 암 환자가 견디기에는 힘든 기간이다.
실제 지난달 14일 네이버 면역항암카페 관계자는 면역항암제에 대한 신규 면역항암제 투여를 준비 중이던 환자 중 2명이 사망했다고 밝히면서 다학제위원회 심사와 의약품 허가초과 승인 제도의 폐지를 촉구했다.
카페 관계자는 “다학제위원회 심사와 사전승인제도의 폐지를 촉구하며 오프라벨을 의료진의 재량권으로 보장해줘야 한다”며 “이 모든 문제의 책임을 지고 심평원 담당자는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며, 보건복지부 또한 이 사안에서 나 몰라라 하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지난 2014년에는 로슈의 항암제 ‘아바스틴’(베바시주맙)이 급여적용을 받게 되면서 황반변성 환자들이 오프라벨 사용을 할 수 없게 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아바스틴은 항암제이지만 황반변성에도 효과가 있어 안구 주사용으로 사용해 왔다. 지난 2014년 3월 보험등재 되기 전까지는 비급여 품목이어서 의사의 책임 아래 황반변성 환자에게 처방할 수 있었다.
아바스틴을 더는 황반변성 환자에게 사용할 수 없게 되자 대학병원을 포함한 많은 안과들은 심평원에 ‘허가 초과 약제 비급여 사용 승인’을 신청했으나, 불승인 통보를 받았다. 대체 약제가 있으므로 사용 승인을 해줄 수 없다는 게 심평원의 답변이었다.
아바스틴은 1회 치료 기준 약값은 20~30만원에 불과하지만, 대체약제로 꼽히던 노바티스 ‘루센티스’의 1회 치료 약값은 105만원에 달해, 환자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최대 5배 이상 비싼 약값을 부담해야 할 상황에 놓이기도 했었다.
의료계, 심평원 삭감 우려 … 승인 신청 소극적
심평원에 대한 의료계의 불신으로 허가초과 사용 승인 신청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항암제가 아닌 의약품은 의료진이 허가범위 외로 약을 사용한 후 사후에 승인을 받는 형식이다. 그런데 이미 약을 사용한 후 심평원으로부터 사후에 불승인 통보를 받게 되면 병원은 이후부터 해당 약을 허가범위 외로 사용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처방한 비급여 비용을 심평원으로부터 삭감이나 환수당할 수도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의료진은 되도록 허가범위 안에서 약을 처방하려는 경향이 크고, 허가범위 초과 사용 신청에 대해서는 소극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면역항암제도 예외가 아니다. 최근에는 의료진들이 면역항암제 허가초과 사용 승인 신청을 주저하자 오히려 심평원이 “면역항암제 비급여 처방에 대해 삭감하거나 환수하는 일은 없다”며 신청을 독려하는 분위기다.
의료계도 “의약품 허가초과 사용 승인 제도 문제 있다”
이처럼 의약품 허가초과 사용 승인 제도가 여러 논란을 낳자 최근에는 환자뿐 아니라 의료계도 이 제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나서는 모양새다.
대한비뇨기과학회는 지난달 28일 열린 제69차 추계학술대회 기자간담회에서 오프라벨 사용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허가범위 초과 비급여 사용 승인 절차’가 효율성 면에서 크게 떨어진다”고 비판했다.
최근 학회 차원에서 ‘알파차단제’의 급여기준을 전립선염과 요로결석 질환으로 확대해 달라고 심평원 약평위에 요청했으나, 심평원이 급여기준을 기존대로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그 이유 중 하나로 허가초과 사용 승인 제도가 마련돼 있는 점을 꼽자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풀이된다.
학회 민승기 보험이사는 “학회가 충분한 학문적 근거를 가지고 요청하는 잘못된 급여기준 개선 및 허가 외 사용을 거부하는 명분으로 이 같은 절차를 이용하는 것은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며 “제도적인 보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허가초과 승인제도는 임상시험심사위원회(IRB)와 심평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를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어려울 뿐 아니라 일부 병원에서만 실시할 수 있으며, 비급여로 환자가 전액 약값을 부담해야 하므로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민 보험이사의 설명이다.
민 보험이사는 “최근 복지부가 허가초과 사용에 대한 해결책으로 '허가초과 제도개선 협의체'를 운영하겠다고 밝혔지만, 무엇보다 전문가 의견을 경청하고, 잘못된 급여기준을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