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시절의 고통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지나간 시절의 고통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 하주원 원장
  • admin@hkn24.com
  • 승인 2016.10.06 1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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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스코리아뉴스] 최라순 할머니의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두 집 살림을 했다. 아들을 못낳은 최라순씨의 남편이 두 집 살림을 하는 것을 시부모님들은 은근히 반기고 그쪽에서라도 아들을 낳기를 바랬다. 최라순씨는 남편이 언젠가 돌아올 것이라고 기다리며 열심히 세 딸과 막내아들을 키우며 살았다.

수십년간 두 집 살림을 하다가 암을 진단받은 남편. 마침 또 다른 제3의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이 들통나서 집으로 쫓겨오게 되었다. 첫째딸이 일곱살 때 집을 나가, 한달에 사나흘 정도 얼굴 비추며 지낸 20년이 모두 저 너머로 흘러가 버린 뒤였다.

그리고 진짜 내 집에서 제1의 여자인 최라순씨의 병수발을 받다가 2년만에 돌아가셨다. “자네 고생했지?”라는 말을 남기셨다며 눈물을 훔치던 최라순씨. 이내 다른 어르신들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남자들이 바람 피워도, 그거 한때여. 다 돌아오게 되어 있다니까”

▲ “남자들이 바람 피워도, 그거 한때여. 다 돌아오게 되어 있다니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르신이 20년간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힘든 세월이 준 열매를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어느 정도의 효율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와 바람 피운 남자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오랜 믿음에 대한 짧은 확인은, 인고의 세월에 비하면 작은 열매가 아닌가.

한 달에 사흘 집에 들어오는 와중에 생긴 최라순씨의 아들. 키가 크고 잘생겼는데, 쪼마낳고 복없게 생긴 여자와 결혼하고 말았네. 결혼해서 겨우 한두달 다른 여자를 만난 것 갖고 며느리가 이혼하자고 난리란다. 그것도 전화기를 훔쳐보다가 알아놓고서 뭐가 그렇게 당당한건지 모르겠다.

내 아들이 때리기를 하나, 두 집 살림을 차렸나. 남자가 한번쯤 그럴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내 팔자에 비하면 편한게 아니냐고 나에게 물으신다. “그래도 그거는 아니지. 앞에서라도 아들을 따끔히 혼내야 돼” 라고 하시는 여자 어르신 딱 한분. 그리고 함께 앉아 계시는 남자 어르신들은 말씀이 없다.

‘시대를 잘 만나 공부할 수 있었고 애도 겨우 둘 낳아서 키우는 팔자 편한 요즘 여자’인 나는 좀처럼 공감을 하지 못했다.

내가 고통을 참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지나간 시대의 여자들이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차별 받았고, 폭력의 피해자가 되어도 꾹 참았었다고 해서 다음 세대의 여자들도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고통을 남이 겪는 것을 당연시 하면 어떻게 되는가?

나의 고통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마음의 상처를 ‘극복한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극복한다는 것이 잊어버리는 것은 아니다. 치매도 아니라면 지나간 모든 일을 그렇게 쉽게 잊을 수가 없다. 극복의 여러가지 의미 중 첫 단계는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 것이다.

물론 무조건적으로 기억상실에 걸린 사람처럼 과거를 잊거나 그런 일이 없었다고 하는 경우는 드라마와 달리 드물다.

두번째 단계부터가 중요한데, 과거의 고통을 당연시하지 않는 것. 내 과거를 무조건 그때는 다 그랬다며, 고생이 아니라고 치부할 필요는 없다. 안 좋았던 환경이 내 탓은 아니니까. 고통을 겪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자비로 스스로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세번째 단계는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몇십년 간 전쟁이 지속된 나라에서는 마치 그것이 정상 같고, 몇십년 간 바람 피우는 남편을 기다린 입장에서는 마치 그것이 정상 같을 것이다. 그런 당연함 속에서 다음 세대를 대한다면 과거에 지는 것이라고 한다.

▲ 그냥 잊고 용서하라고 하면, 사실은, 사실은, 참 힘들다.

그래서 지금 고부갈등으로 오는 30대나 40대에게 다짐을 받는다.

“나중에 시어머니 되시면 절대로 그러지 마세요”

그렇게 말씀드리면 내가 그럴 리 있겠느냐며 고개를 젓지만 모를 일이다. 그건 전두엽 등 high road를 경유하는 고위인지기능이 아니라 low road에 저장된 것이다. 습관을 고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예컨대 때리는 아버지나, 아들을 차별하는 어머니 아래서 자라났는데 그걸 진심으로 반복하지만 않는다면, 나는 “당신이 적어도 절반 이상 이겼다”고 말한다.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중요한 용서나 화해 이런 것은 앞의 3단계가 되어야 하든지, 말든지 하는 것이 아닐까. 그냥 잊고 용서하라고 하면, 사실은, 사실은, 참 힘들다.

하지만 나의 이런 가설과 이론과는 달리 최라순 어르신께 며느리도 남의 집 귀한 딸이라고 설득한다거나, 당신이 겪은 고통을 똑같이 겪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설득을 하기는 어려웠다. 아드님의 행복을 위해서는 지금 어떻게 하는게 좋겠냐는 말씀에 그나마 귀를 기울여 주셨다. <연세숲정신건강의학과 하주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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