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정부는 국민건강권을 단두대에 올려놓고도 의료인들의 침묵을 기대하는가
[성명] 정부는 국민건강권을 단두대에 올려놓고도 의료인들의 침묵을 기대하는가
  • 대한전공의협의회
  • 승인 2015.01.0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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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지난 12월 28일 ‘규제기요틴 민관합동 회의’를 개최해 경제단체로부터 건의 받은 114건의 규제완화 사항에 대해 범정부적으로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11월 열린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규제의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소명하지 못하면 일괄 폐지하는 규제 기요틴을 확대해 규제혁명을 이룰 것"이라는 발언을 했는데, 대통령의 이러한 ‘규제 사형선고’에 대한 화답으로 정부가 114건의 ‘규제 사형수’를 선정해 발표한 것이다.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명 하에 보편적 국민 권익을 위해 필요한 규제들까지 분별없이 철폐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비판을 각계로부터 받고 있다. 규제기요틴은 특히 보건의료분야에 있어 국민건강권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음이 명백하여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이를 묵과할 수 없다.

첫째, 규제기요틴은 의료체계에 되돌릴 수 없는 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의료비용의 비효율적인 상승을 일으킬 것이다.

정부는 의료계의 의견 수렴도 없었고 뚜렷한 근거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 경제단체의 건의사항만을 듣고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한의사의 현대의료기기 사용 허용에 관해 의료기기별로 유권해석을 통해 한의사가 사용할 수 있는 진단·검사기기를 새롭게 규정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의사가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도록 허용한다면 그것은 면허범위를 벗어난 의료행위를 금지하고 있는 현행 의료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이를 행정부의 유권해석만으로 추진한다는 것은 법체계를 무시하며 혼란을 초래하는 발상이다.

우리나라의 현행 의료체계에서 한의학과 현대의학은 교육과정과 임상적 차원 모두에서 이원화 되어 있다. 학문적 기초가 현대의학과 서로 다른 한의사는 현대 의료기기를 적재적소에 사용할만한 기초적 지식과 임상적 훈련을 쌓은 적도 없고 검증 받은 적도 없는, 전혀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현대의학의 모든 행위들은 근거중심의학의 원칙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무작위 대조군 연구를 실시하거나 축적된 보고들에 대한 메타분석을 통해 근거가 확립된 경우에 한해 검사와 처치를 적용하도록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의학은 현대의학의 근거중심의학 패러다임과는 별개의 체계로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한다. 한의사들이 의학적 원리에 근거한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한다는 것은 한의학 체계를 배운 적도 없는 의사들이 한의학 원리에 기초한 탕약을 제조하는 것과 다를 것 없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의료체계의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한의사들이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무작정 허용하겠다는 것은 의료계와 한의계간 극단적인 갈등만 초래할 뿐이다.

한의사들이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하도록 허용되면 의료기 관련업계의 입장에서는 의료기기를 판매할 새로운 시장이 열리는 것을 의미하므로 경제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에는 도움이 된다는 주장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현대의료기기 사용으로 추가적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된 한의원들은 현대의료기기를 경쟁적으로 도입하게 될 것이고 투자된 비용을 회수하기 위해 더 많은 의료기기 사용 처방을 내려 할 수 있다.

이렇듯 ‘공급자 유발 수요’를 창출할 수 있는 것이 의료의 특수성이다. 한의사들이 불충분한 근거로 현대의료기기를 사용해 의료재정이 낭비된다면 그 비용은 모두 국민들의 호주머니에 부담을 줄 것이다.

규제기요틴에는 비의료인에 의한 문신행위와 카이로프랙틱 행위 허용 또한 담겨있다. 비의료인도 소정의 관련 교육만 받으면 인체 침습행위와 도수치료를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들은 인체에 대한 침습성 있고 부작용의 위험성을 무시할 수 없어 국민건강에 대한 보호를 위해 규제해온 것이다. 경제인들의 요청이 있다고 해서 국가가 앞장서서 이를 허용하겠다는 것은 국가가 국민건강을 돌볼 책임을 포기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내준다.

둘째, 정부가 발표한 ‘규제기요틴’은 다름 아닌 국민건강권을 겨누고 있는 칼날이다.

정부에 의해 단두대에 올라서게 된 규제들 중 보건의료 부문에는 국민건강권에 심각한 위협이 우려되어 의료계와 시민사회가 그 동안 꾸준히 반대해온 사항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정부는 이번 발표를 통해 의사-환자간 원격진료 허용 의지를 다시 한 번 밝혔다. 의료계가 안전성과 효과성의 문제로 반대하였음에도 보건복지부는 원격의료 시범사업을 추진했고 그 결과를 근거로 삼아 의료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의료전문가들이 제기한 합리적인 반대를 무시하고 경제단체의 요청을 받아 이런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것은 정부의 정책 추진의 목표가 국민 건강권 증진이 아니라 원격의료 관련 산업의 활성화에만 맞춰져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정부는 이번 발표에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을 조속히 제정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는데 이는 의료영리화의 가장 대표적인 법안으로 의사협회와 약사회, 치과의사협회, 한의사협회, 간호협회 등 보건의약 5개단체가 강력히 반대 해온 법안이다.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은 기획재정부 산하에 '서비스산업선진화위원회'를 설치하여 교육, 의료 등의 서비스산업 정책을 심의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인데 기재부 장관이 위원장이 되는 서비스산업선진화위에 사실상 전권을 부여해 의료정책을 기재부 장관이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정부는 의료전문가를 배재하고 경제 관료들에게 국민 건강을 책임지도록 맡기겠다는 것이다.

정부는 또한 경제자유구역 외국영리병원의 설립 요건 중 ‘외국의사 면허소지자 비율 10% 이상’ 기준과 ‘병원장을 외국의사 면허소지자로 임명하는 규제’도 폐기하는 등 사실상 경자구역 내에 내국인을 대상으로 한 영리병원을 허용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해 중국의 부실 기업체와 함께 제주도에 ‘싼얼병원’이라는 국내 1호 외국계 영리병원 설립 허용을 추진했고, 이를 '투자개방형 외국병원 유치' 성과로 내세우려 했다. 하지만 싼얼병원은 중국의 부실기업에 보건복지부가 사기를 당한 황당한 사건으로 결론이 나며 국제망신을 자초했다. 이에 대한 반성 대신 외국영리병원 설립 요건을 다시 한 번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의료영리화 정책들을 패키지로 묶어 얼렁뚱땅 추진하려는 정부는 재벌과 경제단체의 민원사항에 봉사하기 위해 국민들의 보편적인 권익을 짓밟고 있다는 비판을 모면키 어렵게 되었다. 장기적 저성장과 경기침체에 국민들은 아파도 병원에서 진료 받거나 치료 받기를 포기해 누적된 건강보험 흑자가 12조원에 이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투자활성화를 명분으로 각종 규제완화를 추진해 의료비용 상승시키려는 정부는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셋째 대전협은 의료인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국민건강권을 위협하는 정부를 규탄한다.

1만 7천 전공의들은 현재의 비정상적 수련환경으로 인해 국민들이 건강을 누릴 권리가 저해되고 있음을 알려왔고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는 정부가 이를 개선해 나가리라 믿으며 인내해왔다. 하지만 정부의 규제기요틴 발표는 정부의 관심이 국민건강권이 아니라 엉뚱한 곳에 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전문가들과의 일말의 논의 절차도 없이 한의사들의 현대의료기기 사용을 허용하겠다는 정부에게 전공의들은 실망과 울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또한 의협과 대전협 등 의료 각계에서 그 동안 무수히 피력해온 원격의료 반대, 의료영리화 반대 의견을 모두 단두대로 처단해야 할 규제로 규정한다는 것에 참담한 심경을 느낀다.

규제기요틴이라는 기괴한 형용으로 꾸며진 정부의 이번 발표는 원격의료 반대와 의료영리화 반대를 핵심 아젠다로 지난해 3월 총파업까지 단행했던 11만 의료인을 모두 단두대에 올라간 사형수의 처지로 전락시켰다.

정부는 의료체계가 침몰하려는 위기 상황에서도 의료인들이 국민들에게 ‘가만히 있으라’고 외쳐주길 기대하는 것인가. 국민들의 건강과 안전을 책임지는 의료전문가들의 사명은 진실을 알리는 것이다. 정부가 만든 단두대의 서슬이 아무리 살벌하다 해도 의료전문가의 일원인 전공의들은 규제기요틴이 국민건강을 위협하고 있다고 외칠 수밖에 없다.

정부는 맹목적인 규제완화를 즉각 중단하고 국민 건강권 수호라는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라. 대전협은 의료를 왜곡시키려는 정부의 모든 움직임에 맞서 국민들과 함께 싸울 것이다. ‘존재 이유를 명확하게 소명하지 못 하는 규제들을 일괄적으로 단두대에 올리겠다’는 정부의 말에 따르자면 지금 단두대에 올라가야 하는 것은 규제가 아니라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며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는 정부 자신이다.

2015. 1. 2

대한전공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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