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생명과 말띠 해에 대한 단상
인간생명과 말띠 해에 대한 단상
  • 주장환
  • 승인 2014.01.02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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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의 인생은 어느 시기에 경외감과 아이러니 그리고 성공으로 직조된 모직물과 같다고 여겨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은 인생을 ‘시지프스의 노역’과도 같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시지프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그는 제우스의 노여움을 사서 거대한 바위를 산꼭대기에 올려놓는 형벌을 받는다.

하지만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떨어지고 또다시 굴러 떨어지는 지옥과도 같은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지프스 신화는 다람쥐 쳇바퀴처럼 같은 일(혹은 생각)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우리 인간을 표상한다.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장장 3편의 시리즈로 공전의 히트를 쳤던 영화 ‘매트릭스’는 미래세계를 배경으로 인간의 허무함을 보여주고 있다.

매트릭스는 수학에서 행렬, 주물을 만드는 거푸집, 자궁, 모체 등을 뜻하는 말로, 영화에서는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컴퓨터 프로그램이자 가상현실이다.

매트릭스는 인간들의 삶이 단지 기계가 만들어 낸 컴퓨터 시뮬레이션에 불과하다는 철학적 주제와 페이소스로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세계 미래학회가 내놓은 미래 전망의 주 뼈대는 푸줏간 칼잽이가 살을 척척 발라 놓은 듯 앙상하다.  인간의 장기를 기계에서 찍어내는 '장기 제작기'가 보급돼 앞으로 인간이 장기 부족으로 생명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또 펜이나 자동차 운전대 등 매일 사용하는 물건에 부착된 신체 반응 측정 장치가 스트레스 · 분노 등을 측정해 질환 위험 신호를 감지하는 기술이 나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나아가 인류가 '강화한 인간'과 '비(非) 강화한 인간'으로 양분될 것으로 내다봤다. 유전자 조작 기술의 발달로 특정 기능이나 부위를 강화한 인간들이 탄생하기 시작하면서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은 서로 가족을 이루고 살지 못할 정도로 이질적인 인간형으로 분리된다는 것.

이렇게 되면 플라톤이 국가에서 언급한 철인(플라톤이나 헤겔적인 의미를 넘어선 진짜 근육형 강철인간)이 나타날지도 모르며 아무나 터미네이터가 될 날도 머지 않은 듯하다.

물론 당장 실현되는 일이 아니라 20~30년 후의 미래 모습이다. 그러나 무언가 목뒷줄기를 낚아채는 듯한 느낌은 여전하다. 그건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처럼 음울한 한기가 엄습해 오는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실 유전자를 추출해 복제인간을 만든다고 자신이 영생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생명의 핵심은 정신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특히 더 그렇다.

생명의 신비를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는 샤르댕의 인간의 영적진화설(靈的進化說) 등은 상기인들에게 중요한 철학적 개념을 부여한다.

앞으로 인류는 육체가 필요 없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아바타를 뛰어넘는 또 하나의 진보다. 기억을 이식시키는 기술들이 급속하게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 과학자들은 동물실험을 통해 뇌의 기억을 저장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따라서 기억(정신)이 사람을 지배한다면 육체는 필요가 없게 된다. 기억(정신)만이 살아있는 인간, 육체가 없다면 몸에서 오는 질병과 상처도 무의미해지게 된다.

이제까지 신진대사 작용의 멈춤은 곧 생명의 종말, 즉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런 관념도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정신(기억)과 의식의 종료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나의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나의 삶은 절대자의 것이며, 삶을 인도하는 존재도 절대자에 의한 것이라는 믿음이 하루아침에 원펀치를 맞은 것처럼 뇌골 속 뉴런에서 절멸된다.

이런 혼란을 예방하기 위해서 과학적 개발에 대한 사용에 있어서 가치중립성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인류는 이런 가치중립성을 따지지 않고 기술을 개발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가치중립성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과학은 우리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지만 그 정보에 대한 결정은 사람이 하기 때문에 미래에 나타날 위험을 모르는 것이다.

과학은 인간행동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절대적인 확신을 제공하는 지식을 양산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사회에 여러 형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할지라도 종교나 문학, 미술 등에 관해서는 의견이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1+1=2라는 수학적 법칙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인다.

이는 이른바 과학이 실험을 바탕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방법론을 통해 발전되고 지속돼 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든 첨단과학은 인간이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다양하게 바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체의 본질을 파악하는 일은 범상치 않다. 반야심경에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라 하여 모든 존재에는 실체가 없다고 설하고 있으며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를 통해 존재의 허상을 갈파하고 있으나 뭐가 뭔지 뒤죽박죽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에게 있어서 존재는 ‘마법의 물질’ 같은 것이다. 이것은 어떤 물리학, 또는 화학 시스템에서도 찾을 수 없는 예외적인 방식으로 움직인다. 생명체의 특성은 자율성과 적응성, 목적 지향적인 행동, 즉 화학반응을 이용해 이미 설정된 목표를 실행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과학자들은 이를 컴퓨터에 비유하면 화학 작용은 컴퓨터를 구성하는 물질이지만 프로그램과 데이터 없이는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면서 이처럼 새로운 관점을 갖고 본다면 생명의 기원을 추적하는 연구방식도 달라질 것이라 지적하고 있다.

인생은 투명하지 않다. 인생이 투명하다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서 하루도 살지 못하거나 희망에 넘쳐서 가슴이 터져 버릴지도 모른다. 자신 혹은 그가 속한 공동체의 삶이 한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생은 안개와 같다.

흐려져 있어서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그 안개 속을 더듬고 헤쳐 나가는 그런 미지의 세계, 그것이 인생이며 그래서 묘미가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는 ‘안개속에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안개 속을 거니는 이상함이여,
덩굴과 돌들 모두 외롭고,
이 나무는 저 나무를 보지 못하니
모두가 다 혼자로구나! (하략)

자! 산다는 것은 안개처럼 흐릿하다. 그 속에는 희망도 있고 사랑도 있으며 기쁨도 슬픔도 괴로움도 있다.

긍정적 사고방식은 긍정지능에서 나온다. 이는 자신과 타인에게 공감하고 깊은 호기심으로 탐구하며(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랬다!) 혁신적인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있다.

그것은 뮤지컬 아이다의 ‘노예의 합창’처럼 가없는 고양감을 안겨주고 영화 ‘레미제라블’에서 손비르크와 알랭 부보리가 만든 노래처럼 눈물 뚝 떨어지게 만드는 감정선을 폭발시키게 만들기도 한다.

어차피 흐릿한 것이 삶의 실체라면 안개 속을 용맹무쌍하게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 가보는 것도 자신의 삶을 아첼레란도 하여 등룡하는 방법 중 하나가 아닐까. (본지 논설위원, 소설가,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의학전문지 헬스코리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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